LVMH Winners Interview for W Korea
2020.06.06 FASHION
팬데믹 시대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
코로나 19의 대유행으로 젊은 디자이너를 육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인‘LVMH 프라이즈 2020’의 결선이 취소되었고, 파이널 리스트에 오른 8명의 디자이너에게 30만 유로의 상금이 고르게 분배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지금 우리에게는 경쟁이 필요하지 않다. 각자의 자리 를지키며, 나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긍정적인 움직임을 도모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 더블유는 수상이라는 빛나는 성휘를 축하하고, 새로운 인재를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 파이널 리스트에 오른 5명의 디자이너와 랜선 인터뷰를 진행했다.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도모할 아이디어가 가득한 이들은 지금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케이티 그랜드, 팻 맥그라스, 귀도 팔라우, 마크 제이콥스 등 어벤저스급 친구들의 무한 신뢰를 받고 두 시즌 만에 패션계를 사로잡은 순수한 디자이너
토모 코이즈미(Tomo Koizumi), @tomokoizumi
2019 F/W로 데뷔하면서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알고 있나? 어벤저스급 친구들과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된 건지 궁금하다.
토모 코이즈미 2018년 말 패션 관련 인스타그램 계정 몇 개가 내 옷을 공유했는데, 이때 디자이너 자일스 디컨과 영국의 모델이자 배우, 그웬돌린 크리스티가 나를 팔로했다. 그 후 간간이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나를 팔로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케이티 그랜드와 친구였고, 그녀에게 내 옷을 얘기해준 것 같다. 2018년 말 <러브> 매거진 화보 촬영을 위해 내 옷 몇 벌을 빌려 주었는데 그때 카이아 거버가 내 옷을 입고 화보를 찍었다. 그다음 내 첫 번째 쇼의 마지막 룩인 거대한 드레스를 2019년 초에 디자인하고 나중에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또다시 자일스를 포함한 몇 사람들이 리그램했다. 그리고 케이티가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본 컬렉션 중 최고다”라는 내용의 DM을 보냈다. 그 후로 그녀가 나에게 패션쇼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작년 2월 뉴욕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고 패션쇼를 하게 됐다.
첫 쇼를 뉴욕의 마크 제이콥스 매장에서 계획한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케이티의 아이디어였다.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는 런던에서 패션쇼를 하자고 계획했지만 마크 제이콥스 매장에서 쇼를 하면 비용이 들지 않고, 뉴욕에서는 모두가 같이 일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결정했다. 결정적으로 뉴욕에는 실용적인 브랜드가 많아서 내 브랜드가 더 돋보일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50~200m 직물로 제작한 시그너처 드레스는 어떻게 시작된 건가? 3~4년 전부터 러플 기법을 활용한 디자인을 많이 했다.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늘 거대하고 화려한 드레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에 좋은 원단을 맘껏 사용할 수 없었고, 그나마 접근 가능한 원단은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오간자 등이었다. 게다가 재고 직물이다 보니 색상별로 길이에 제한이 있어 고심 끝에 여러 가지 색상의 직물을 매칭해서 큰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다채로운 러플 기법이 탄생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대응한 방식이 디자인의 초석이 된 셈이다.
2019 F/W 시즌 열린 첫 쇼의 아이디어를 알려달라. 첫 번째 쇼에서 28가지 룩을 선보였는데, 케이티로부터 DM을 받은 후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아카이브에서 선별했다. 이런 스타일의 디자인을 3년 이상 작업해온 터라 아카이브에 보관된 의상이 제법 있었고, 나머지는 새로 디자인해서 뉴욕으로 보냈다. 말도 안 되게 힘들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20 S/S 두 번째 쇼는? 첫 번째 쇼 이후 많은 바이어들과 유명 백화점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과 대화하는 게 재밌었지만 그때 나는 컬렉션을 어떻게 생산하고 판매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첫 쇼를 하기 전까지는 내 옷을 판매할 생각 조차 안 했기 때문에 가격 책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2020 S/S 쇼 에서는 주문할 수 없는 것을 만들기로 했다. 두 번째 컬렉션에 더 큰 드레스를 만든 이유다. 첫 번째 쇼가 너무 좋은 반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내 태도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첫 번째보다 더 좋은 컬렉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드레스를 딱 7개만 만들고, 모델 한 명에 입혀가며 다른 메이크업, 다른 헤어스타일을 보여주는 조금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이 색다른 구성의 쇼를 즐겁게 봐줘서 다행이다.
모델 아리엘 니콜슨은 훌륭했고, 퍼포먼스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다음 시즌도 기대된다. 다음 쇼는 어떤 스타일로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에 패션위크 개최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 아닌가. 만약 패션쇼를 열 수 있다면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까 한다. 그때도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
두 차례에 걸쳐 쇼를 마치고, 당신의 인생은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작년 5월에는 메트 갈라를 위해 뉴욕에 갔는데 파티에 참석하는 클라이언트를 위해 드레스 하나를 만들었다. 그 당시 내 첫 쇼 드레스 중 두 벌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 상황이었는데 그들은 가장 큰 드레스를 영구 소장 컬렉션으로 매입하기도 했다. 그 밖에 ‘BoF 500’에도 선정되고, 지난 9월 쇼의 퍼포먼스로는 ‘Fashion Media Award’를 받았다. 뉴욕 패션위크 전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케이트 모스와 젠다야가 참석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 케이트 모스 앞에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게 되어서 굉장히 놀랐다.
잘 팔리는 옷과 패션 판타지를 추구하는 일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크고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의상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 실용적이고 평범한 옷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까지 그런 옷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당신의 옷이 실용적이게 바뀌는 시점이 오기는 올까? LVMH 프라이즈 이후 판매용 옷을 만들까 생각했는데 지금 이 시기에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몇 가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서 콜라보 옷들을 통해 내 디자인을 사거나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화장품 브랜드와도 협업할 예정인데, 사람들이 내 패션쇼의 큰 드레스까지는 아니지만 내 브랜드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프로젝트인 것 같다.
코로나19가 디자이너들의 행보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듯하다. 당신은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하고 있는지? 나는 8년 넘게 혼자 일하고 있다. 그래서 두세 달 동안 일이 없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디자인이나 기법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포스트 코로나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날 테니 새로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굉장히 어렵겠지만 지금 우리 세대, 젊은 세대가 달라진 지형의 패션 산업에 새로운 표준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당신이 평소 좋아하는 것을 나열해본다면? 비요크의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 언젠가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만들고 싶다. 킴 페트라스 가수, 테크노 음악, 한국 음식, 서울, 런던, 도쿄, 무라카미 하루키, 네온, 파스텔 컬러 등을 좋아한다. 나는 실제로 검정, 베이지, 회색 옷을 많이 입지만 여름이 다가와서 오늘은 오렌지색 의상을 입었다(웃음). 평범한 옷을 주로 입는데 내가 입는 옷으로 주목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당신의 룩은 어떻게 변화할 것 같은 지? (무척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언급했듯이 작은 규모의 팀으로 일하는 까닭에 인터넷을 통한 파급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 모두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차려입고 갈 행사가 없는 요즘 파티용 드레스 같은 것이 아니라 전시회처럼 인터넷으로 보는 것이 패션이 될 수 있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나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5년 뒤에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내 미래에 대해 잘 모르겠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계로 이미 진입한 셈이다. 그저 내 창의력을 오래 유지하고 싶다.
셀린느, 데렉 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성과 융통성을 유지한 채 새롭고 실험적인 웰메이드 미니멀리즘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피터 도(Peter Do), @the.peterdo
1 년 반 전에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 그룹에 의해 시작된 브랜드라 들었다. 피터 도를 구성하고 있는 친구들을 소개해달라.
피터 도 브랜드 아이디어는 2년 전 거실에서 처음 떠올렸다. 곧바로 친구 몇 명 불러서 정신 나간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같이할 생각이 있느냐 물어봤다. 만약에 그들이 거절하면 혼자선 못할 거라고 얘기도 했다. 그 친구들이 제일 먼저 합류했고, 이제는 팀이 12명으로 늘었다. 안(An)은 내 오른팔로, 나와 같이 컬렉션 디자인을 맡고 있다. 빈센트는 사업 파트너이자 판매 디렉터다. 제시카는 소통과 전자상거래 디렉터다. 그리고 리디아는 이 모든 걸 종합하는 역할로, 사업 전반을 담당한다. 개별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다. 시간이 흐르며 일과 관련된 고충을 공유하다 보니까 실생활에서도 친구가 되었다. ‘피터 도’ 사업을 전개하는 우리의 공통점은 색다른 것을 시도하는 데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는 모험가라는 것이다.
셀린느, 데렉 램에서의 이력이 있다. 당신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 그곳에서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2014년 LVMH 대학생 부문 상을 타고 나서 셀린느의 피비 파일로 밑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그곳은 약간 도제 훈련소와 비슷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직물 개발 일이었다.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정말 패션계에 눈이 튼 것 같다. 피비가 하는 작업과 디자인을 보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여자를 생각한 디자인과 자신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데릭 램한테 갈 때는 선임 디자이너 자격으로 갔는데, 옷 디자인 이상을 배울 수 있었다. 디자인의 비즈니스 면모를, 쇼룸부터 바이어 만나기, 팀 관리까지 전부 배웠다.
하이엔드, 진정한 럭셔리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매우 개인적인 질문인 것 같다. ‘럭셔리’라는 개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대학에서 처음 ‘럭셔리’를 접한 것은 매장이었다. 들어가면서도 이런 겉치장은 내 취향이 아님을 느꼈다. 고압적으로 느껴졌달 까? 내가 배운 럭셔리는 전부 외부인의 입장에서 관찰한 것이다. 매장이나, 학생 신분으로 배웠지 직접 생활 속에서 입어본 적은 없다. 나한테 럭셔리란, 디테일과 대외 구매와 직접 제작과 옷을 만드는 데 기여한 모든 사람의 종합이다. 많은 사람이 럭셔리의 기준을 유명 브랜드나 가격표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 기준도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피터 도처럼 젊은 브랜드도 팔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피터 도가 추구하는 옷은 어떤 옷이고, 브랜드는 어떤 가치를 따르는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다양성과 융통성이다. 이 같은 특성을 갖추기 위해선 시험과 피팅이 필수다. 딱히 미니멀리즘 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덜어내는 과정은 무시할 수 없다.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어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적응 가능한 옷을 만드는 것, 그것이 포인트다.
잘 만들어진 옷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람들은 왜 잘 만들어진 옷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옷, 특히 웰메이드 옷을 만들 때엔 ‘보이지 않는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최종 작품이 나오기 전에 몇 시간 동안 회의와 조사, 피팅 등을 통해 모든 디테일을 시험해본다. 무엇이 웰메이드 옷이냐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웰메이드 옷이란 입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옷이다. 그런 까닭에 옷을 입게 될 여자와 옷을 입는 목적을 고려해 디자인한다. 사람들에게 옷에 어떤 점을 바라는지 물어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답이 편안함이다. 추리닝 같은 편안함이 아니라 편안한 디자인을 말한다. 그래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시간이 흘러도 버려지지 않는 옷을 만들려 한다.
지속 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금 패션을 하는 모든 사람들, 브랜드의 숙명이다. 당신은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 지속 가능성 역시 중요히 다뤄야 할 문제다.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는 데 정해진 공식이 있는 건 아니다. 피터 도에선 그저 지속 가능, 친환경 등의 단어를 체크리스트에서 지우는 것보다는 하나의 접근법을 세우려고 한다. 우리가 만드는 디자인은 두 시즌 이상 지속되며, S/S 땐 실험성을 위주로, F/W 땐 조금 더 안정성과 성숙성을 중심으로 작업한다. 시그너처를 계속 사용하는 것과 직물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것, 남는 가죽을 재활용하는 것은 브랜드 창립 이후 계속해온 원칙이다. 프린트도 매우 좋아하지만,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시도하지 않고 있다.
LVMH 프라이즈 공동 우승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궁금하다. LVMH 프라이즈 참가자, 그리고 파이널 리스트까지 된 것은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프라이즈로 인해 현 시국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회에 참여함으로 패션계 영웅들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한 사람들과, 내가 어릴 때부터 존경해온 거장들까지, 그분들을 만난 게 우리에게 상이었다.
당신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물론 당신의 팬들은 문신으로 당신을 식별한다고 들었지만. 마케팅 전략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브랜드 창립 이후, 피터 도는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된 적이 없다. 시작부터 우리 브랜드의 상징이 팀과 팀이 제작한 옷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옷들이 스스로 빛났으면 했고, 또 한 사람만 주목받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대변되길 바랐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코로나19는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가고 있으며, 어떻게 긍정적인 움직임을 도모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정확한 정보가 매우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브랜드를 시작할 때 대외 구매와 컬렉션 제작 대부분을 뉴욕에서 해결하자고 합의한 것이 이 사태를 이겨내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덕분에 많은 길이 끊기는 와중에도 우린 작업장 내에서 유연하게 상황에 적응할 수 있었다. 또 전자상거래 웹사이트에 중점을 둬서 고객과 직접 연락을 했다. 그리고 반려견 ‘유니’도 이 사태를 이겨내는 데 큰 힘을 줬다. 지난 한 달 동안 유니한테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았다. 현재 우리는 새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중이다. 이렇게 우린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내 궁극적인 목표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터뷰에 언급한 것을 보았다. 자유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 제약도 많을 것 같 다. 당신이 타협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 말이 맞다. 우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 같은 경우는 그 동안 방이 아닌 거실에서 살면서 돈을 아꼈다. 하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친구들도 브랜드에 동참하면서 그들만의 희생을 했다. 그리고 직업적인 면에선, 팀과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많은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감당할 수 없게 일하다가 모든 걸 잃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의리와 신뢰, 친절함을 바탕으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내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팀과 내 동업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이 사람들 덕분에 피터 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결코 내가 포기하지 않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이들에 대한 의리다.하게 나기 위해 언제나 새롭게 시도 해야 한다.(웃음)
CREDIT
패션 에디터 김신
뉴욕 통신원 윤수진
출처 W website